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베델 보카사 (문단 편집) === 황제에서 [[평민]]이 되다 === 이 무렵 보카사 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도 보카사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특사 르네 주르니아크(René Journiac, 1921~1980)를 보내서 선정을 베풀라고 했다. 그러나 보카사 1세는 '''"감히 일개 대통령 주제에 어디 천하의 지배자 보카사 1세 황제에게 대드는 건가!"'''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주르니아크에게 달려든 후 지팡이로 머리를 직접 두들겨 팬 후 추방시켰다.[* 주르니아크는 보카사가 권좌에서 쫓겨나고 약 2개월 뒤인 1980년 2월 6일 기상 악화로 인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당연히 이런 보카사 1세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분노한 [[프랑스 정부]]는 식량지원을 제외한 제국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끊은 후, [[1979년]] [[9월 20일]]에 다코를 지지하던 세력들의 비밀 협조를 받아 방기 공항에 프랑스군 특수부대 [[제1해병공수연대]]를 파견하는 '바라쿠다 작전' 을 개시했고, 기회를 얻은 다코의 반군이 들고 일어나며 군대도 보카사를 배신하면서 제국을 무너뜨렸다. 바라쿠다 작전은 단 한 발의 사격도 없이 무혈로 끝났으며, 다코는 이튿날 방송을 통해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복귀한다고 발표했고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보카사의 '천년 제국'은 '''1대 3년'''이라는 짧디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파일:폭군의 몰락.jpg]] 군중들에게 조롱당하는 보카사 1세의 동상. 보카사 1세가 쫓겨난 직후에 [[축배를 들어라|거의 축제 분위기가 된]] 방기에서 보카사의 초상화는 백성들에게 짓밟혔고, 대관식에도 쓰였던 보카사의 [[옥좌]]는 상술한 것처럼 모두 뜯겨나갔고, 방기에 건립된 보카사의 거대한 동상은 파괴되어 거리로 끌려나가 위의 사진처럼 군중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빌라 콜롱고에서는 냉장고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머리와 팔, 다리 한 쪽이 사라진 시신 한 명은 전술한 수학자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식인설의 증거로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연못에는 악어에게 먹힌 30여 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프랑스군의 침투 당시 [[리비아]]를 국빈 방문하고 있었던 보카사는 베렝고 궁전에 둔 귀중품들을 챙기지도 못한 채 곧 [[코트디부아르]]로 도망쳐 체류했는데, 여기에서 보카사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도움으로 대통령궁에 기거하며 매달 1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받았으나, 보카사는 그 돈을 며칠 만에 다 써버릴 정도로 사치스럽게 살았으며, 어느 날에는 우체국에 갔을 때 자신을 알아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갑자기 지갑을 열고는 사람들에게 돈을 뿌리는 등의 기행을 선보였고, 결국 우푸에부아니는 보카사에게 [[토요타 크레시다]]를 준 채 서민 주택가로 쫓아냈으며, 보카사의 난폭함을 눈치채고는 국가 행사에 초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보카사는 1983년 11월 26일에 수십 명의 용병을 이끌고 비행기에 타서 중앙아프리카로 날아가 '''빼앗긴 왕좌를 다시 되찾으려고 했다.''' 물론 우푸에부아니는 비행기의 이륙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카사 일가를 해외로 쫓아냈다. 한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법원은 1980년 12월 19일에 궐석재판으로 국가 재산 절도, 아동 학살, 식인 혐의로 보카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보카사에게 국제 영장을 발부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도록 명령했고, 프랑스에도 프랑스에 있는 보카사의 자산을 동결할 것을 요구했다. 망명지에서 또다시 쫓겨난 보카사는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받아 1983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10명의 자식들, 내연녀들과 함께 파리 서쪽의 성에서 가택 연금 상황에서 살게 된다. 프랑스에 살던 시절에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카사는 '가장 매력적인 매너를 가진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자식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망명 중에도 자신에게 생활비로 지급되던 군인 연금(당시 가치로 1개월에 5,998프랑, 1,000달러 가량)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면서[* 실제로 보카사는 500만 프랑이 넘는 연금(여러 직책에 따른 연금 200만 프랑+자기 가족들에게 줄 연금 300만 프랑+별도의 [[공과금]])을 받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전에 프랑스 법원에 의해 박탈되었던 자신의 프랑스 시민권을 요구했고,[* 실제로 보카사의 성은 요금 체납 때문에 전기와 수도가 자주 끊겼고, 자식들 중 일부는 좀도둑질까지 했으며, 심지어 보카사 본인도 먹을 것이 없어서 소시지를 훔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85년에는 자신과 프랑스 정부 사이의 관계를 과장되게 서술한 '나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했다가 프랑스 법원에 의해 출판 금지 처분을 당했다.[* 보카사는 이 책에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이 1979년 5월에 본인에게 카트린 황후를 프랑스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 후 카트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임신시켰다는 주장을 했다. 덤으로 보카사는 카트린이 가진 지스카르데스탱의 아이는 지스카르데스탱의 요구로 낙태당했으며, 자신이 후에 폭행한 주리악도 카트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카트린은 이 의혹들을 전면 부인했다.] 보카사의 자서전은 결국 출판되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서 보카사와 친분이 있었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79년 10월 10일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데다가 보카사가 절친이라고 언급했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재무부 장관 시절이던 1973년 4월에 보카사에게서 당시 가치로 25만 달러 정도였던[* 2022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167만 달러로, 한화로는 약 22.8억 원이나 된다.] 30캐럿 정도의 다이아몬드 판을 수수받았고, 이후에도 보카사가 지스카르데스탱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최소 3차례나 더 다이아몬드를 줬다는 것이 발각되어 망신을 당하고 '추악한 독재자와 놀아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1981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 후보인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패배하고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결국 프랑스에서도 보카사에 대한 망명 허용이 비판받는 등 지내기가 영 껄끄러워지자 1986년 10월 23일에 사실상의 추방 형식으로 귀국했다. 이때 보카사는 변장을 한 채 비행기에 탑승하여 당시 가장 사이가 좋던 아내 아세마(Assema)와 자녀 5명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옛 부하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보카사를 알아보고는 이를 기장에게 알렸고, 보카사는 고국에 착륙하자마자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수도의 가벨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보카사는 1986년 12월 15일부터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 재판은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의 전직 독재자에 대한 재판이었다고 한다. 이 재판에서 보카사는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자신의 집권 하의 악행들의 책임을 전직 내각과 군대에게 돌리며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라는 말로 자신을 변호했다. 보카사는 재판 과정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누구에게나 고문이나 죽음을 명령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궁전에 시체를 보관한 적도 없고, 아이들을 때려 죽인 적도 없고, 인육을 먹은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일부 사람들의 체포와 구금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인정한다.' '내 혐의는 내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퍼진 소문이나 내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열성적인 부하들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물론 보카사 시기 관리들은 보카사의 암묵적인 승인 없이는 어리석은 사람만이 그 당시 누군가를 투옥하거나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87-03-15-mn-10897-story.html|1987년 3월 15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기사]] 1987년 6월 12일에 보카사는 14개 혐의 중 13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보카사의 요리사[* 재판에서 보카사가 1979년 2월에 반역 혐의로 수감된 장군을 독방에 가둬놓고는 일부러 진수성찬만 줘 살찌운 뒤 1979년 2월에 처형하고는 요리해서 각료들에게 먹게 했다고 증언했다.] 필리프 링기사(Philippe Linguissa) 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던 식인 행위 하나만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전술한 냉장고 속 시신에 대해 보카사는 고대 아프리카의 신앙에 따라 '행운을 위해' 보관했다고 해명(?)했으며, 재판에서 보카사를 식인을 증언했던 보카사의 요리사는 '정신적으로 미친' 상태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법원은 보카사가 명령하거나 직접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살인 혐의 중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확인된 살인 행각은 20건에 달한다고 인정하며 그 20명의 유족에게 17,000달러를 지불하도록 명령했으며, 결국 장베델 보카사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사형을 선고받은 보카사는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고 하며, 보카사의 변호사들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은 전직 국가원수를 반역죄로만 기소할 수 있다'며 항소를 했지만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두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다코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고 있던 [[앙드레 콜링바]] 대통령은 이 판결에 반대해 1988년 2월 29일에 보카사를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고 이듬해에 다시 20년형으로 추가 감형했다. 그리고 1993년에 콜링바가 자유 선거에서 패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자 마지막 대통령 권한으로 보카사에게 특별 사면령을 내렸고, 보카사는 1993년 8월 1일에 석방된 후 '감옥에서 신을 찾았다'는 말을 남기고 방기에 있는 빌라 나세르(Villa Nasser)에 가택연금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